불안이라는 감정을 다시 보다
세바시를 15년 동안 만들어온 구범준 PD는 그 시간 동안 불안한 사람들, 상처받은 사람들, 관계 때문에 힘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들어왔다. 처음에는 그 이야기들이 시청자를 위로하기 위한 콘텐츠라고 생각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오히려 그 강연들이 자신을 위로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최근 펴낸 책 『마음을 읽는 감각』은 그렇게 세바시 강연자들에게 배운 마음의 수업 노트에 가깝다.
그가 첫 번째로 꺼낸 주제는 불안이다. 다만 불안을 없애는 법이 아니라 불안을 읽는 법에 관한 이야기다.
핵심 메시지
구범준 PD는 불안을 방해꾼이나 나를 약하게 만드는 감정으로만 여겼던 과거를 돌아보며, 어느 순간부터 다른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불안은 정말 나를 망치러 오는 감정일까, 아니면 나를 지키려고 오는 감정은 아닐까 하는 물음이다. 그가 내린 결론은 분명하다. 불안은 대체로 중요한 일 앞에서 찾아오며, 그 밑에는 언제나 잘 살고 싶은 마음이 깔려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불안은 약함의 증거가 아니라 애정의 증거이고 책임감의 증거이며, 내 마음이 아직 깨어 있다는 증거일 수 있다. 시험을 앞두고 불안한 건 그 시험이 중요하기 때문이고, 부모가 아이 때문에 불안한 건 그만큼 아이를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불안을 적으로 보면 도망치게 되지만, 신호로 보면 알게 된다. 불안한 당신은 약한 사람이 아니다라는 말은 이 강연을 관통하는 하나의 문장이다.
주요 내용
중요한 일 앞에서 찾아오는 불안

발표를 앞둔 날, 면접 전날, 중요한 회의가 있는 날이면 불안은 슬그머니 옆에 다가와 괜찮겠냐고, 준비가 제대로 된 게 맞냐고 묻는다. 그런 물음 앞에서 마음은 쪼그라들고 몸도 함께 반응한다. 가슴이 답답해지고 손에 땀이 나고 잠도 잘 오지 않는다.
구범준 PD는 세바시를 15년 만들었지만 지금도 중요한 녹화나 강연 행사를 앞두면 여전히 불안하다고 털어놓는다. 관객이 얼마나 올지, 강연자가 준비를 잘 마쳤을지 하는 생각이 꼬리를 물면 새벽에 눈이 번쩍 뜨이곤 한다는 것이다.
비교가 만드는 조급함

불안은 큰일을 앞둔 순간에만 오지 않는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같은 반도체 주식 뉴스를 보다 보면 나만 기회를 놓친 건 아닌지, 다들 돈을 버는데 나만 뒤처지는 건 아닌지 하는 조급함이 불쑥 올라온다. 회사 걱정도 가족 걱정도 아닌데 마음이 괜히 조급해지는 묘한 불안이다.
구범준 PD 스스로도 투자에 특별한 철학이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뉴스와 주변 이야기를 듣다가 뒤늦게 이미 오른 가격에 사버린 경험을 고백한다. 아무리 나이가 들고 경험이 쌓여도, 심지어 마음을 다루는 책을 써도 불안은 반드시 찾아온다는 것이다.
긴장 이완 전문가도 무대에서 긴장한 이유

14년 전 세바시 무대에는 독일에서 긴장 이완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강연자가 올랐다. 주제는 마음을 편안하게 유지하는 법이었지만, 정작 무대에 오르자 그는 점점 말이 빨라지고 땀을 흘리며 15분짜리 강연을 40분 넘게 이어갔다. 긴장을 이완하는 전문가가 무대에서 가장 긴장한 사람이 된 순간이었다.
이 모습을 지켜본 구범준 PD는 불안과 긴장이 지식만으로는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아무리 잘 알고 있어도, 그 분야의 전문가여도 중요한 순간 앞에서는 누구나 흔들릴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인간이라는 것이다.
불안 아래 숨은 잘 살고 싶은 마음

세바시 인생질문에서 배우 진서연은 불안이 최선을 다하지 않았을 때, 스스로에게 부끄러울 때 커진다고 말한 바 있다. 구범준 PD는 이를 두고 불안이 때로는 아직 준비가 덜 됐다는 정직한 신호일 수 있다고 설명한다.
예일대 정신과 나종호 교수 역시 의대생 시절 감기에 걸려야만 마음이 놓였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다. 아파야만 죄책감 없이 쉴 수 있었다는 것이다. 구범준 PD는 몸이 아파야 쉬고, 번아웃이 와야 멈추고, 마음이 완전히 무너져야 그제야 무리했음을 깨닫는 사람들이 많다며, 사실 불안은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잠깐 멈추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을지 모른다고 말한다.
불안을 읽는 연습, 왜냐하면 세 줄 쓰기
구범준 PD는 요즘 불안이 밀려오면 무조건 없애려 하기보다 먼저 너 왜 왔니라고 마음속으로 묻는다고 말한다. 막연한 불안을 내일 회의에서 의견이 무시될까 봐, 좋은 부모가 아닌 것 같아서와 같이 구체적인 말로 바꾸는 순간 불안은 상대할 수 있는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그가 제안하는 연습은 간단하다. 종이에 나는 지금 불안하다라고 쓰고, 그 아래 왜냐하면으로 시작하는 문장을 세 줄 적은 뒤, 마지막 줄에 그만큼 나에게 중요한 일이다라고 마무리하는 것이다. 이 한 줄은 불안을 없애주지는 못해도 불안을 미워하지 않게 만들어준다.
불안한 당신에게
구범준 PD는 마음을 너무 늦게 보는 습관을 지적한다. 이미 무너진 뒤에야, 관계가 틀어진 뒤에야, 몸이 아픈 뒤에야 마음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그전에 마음은 불안으로, 서운함으로, 분노로 계속 신호를 보내고 있다. 그 첫 번째 신호가 바로 불안이며, 불안을 없애려 하기보다 읽어보라는 것이 그의 제안이다.
그는 오늘 하루, 종이에 불안한 이유 세 줄을 적어보라고 권한다. 그 불안 속에는 어쩌면 당신이 지키고 싶은 삶이 들어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