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08. 14.

백영재 박사가 말하는 경계인의 다섯 가지 힘, MARGIN

세바시 강연|2026. 08. 14.

구글, 넷플릭스, 블리자드 코리아, 필립모리스 코리아, CJ그룹, 맥킨지. 한 사람의 이력이라기엔 좀처럼 하나로 묶이지 않는 이름들입니다. 인류학자이자 경영인인 백영재 박사는 예일대에서 인류학 박사 학위를 받은 뒤 25년 동안 전혀 다른 산업과 직무를 넘나들며 커리어를 쌓았습니다. 그가 새 책 『경계인』에서 던지는 질문은 단순합니다. "한 우물만 파라"는 조언은 아직 유효한가.

핵심 메시지

백영재 박사의 답은 명확합니다. 이제는 틀린 말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만 오해는 없어야 한다고 덧붙입니다. 전문가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한 우물만 파서 닫혀 있는 전문가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는 첫 책 『THICK data』에서 이런 인재상을 π자형 인간이라고 불렀습니다. 원주율 기호처럼 다리가 두 개, 즉 우물을 여러 개 파면서 그것을 연결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경계인이라는 개념 자체는 그가 만든 것이 아닙니다. 사회학자 로버트 E. 파크가 이민자를 연구하며 쓴 개념으로, 서로 다른 문화나 집단 사이에 있어 어느 쪽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백영재 박사는 이 개념을 커리어로 가져왔습니다. 여러 산업군을 넘나들었거나, 한 직장 안에서도 다양한 직무의 경계를 넘어온 사람들. 그렇게 33명을 심층 인터뷰해 그들의 공통 역량을 정리한 것이 『경계인』입니다.

왜 경계인가. 뇌 과학자 장동선 박사의 비유가 인상적입니다. 파티의 한가운데에서 호스팅을 하는 사람은 옆방으로 나가려면 사람들을 비집고 가야 하지만, 문 옆에 서 있는 사람은 한 발만 옮기면 다음 방이 보입니다. 반대로 중심에 오래 머문 사람은 과거의 성공 경험에 갇히기 쉽습니다. 새로운 지식을 배우는 것보다, 이미 성공했던 방식을 지우는 탈학습이 훨씬 더 큰 에너지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주요 내용

M, 모른다고 말하는 메타인지

MARGIN의 첫 글자는 Metacognition, 메타인지입니다. 백영재 박사는 모르는 것을 아는 척 숨기는 일이 정말로 위험해진 시대라고 말합니다. 교수가 강의하는 도중에 학생들이 곧바로 AI에게 확인해 보는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전문가가 1초 만에 답을 주는 환경에서, 아는 척은 더 이상 통하지 않습니다.

모른다고 말할 때 얻는 것은 세 가지입니다. 틀린 답을 고집하는 위험을 막아 주고, 초보자의 마음을 만들어 탈학습의 출발점이 되며, 주변 전문가와 AI를 훨씬 잘 활용하게 해 줍니다. 다 안다고 말하는 사람에게는 아무도 알려주고 싶어 하지 않지만, 내려놓은 사람에게는 도와주고 싶어집니다. 20년 걸려 쌓은 노하우를 2분 만에 건네받을 기회가 열리는 셈입니다. 모른다고 말하는 것은 겸손이기 이전에 용기입니다.

A, 손이 비어야 새 무기를 쥔다

두 번째는 Adaptability, 적응력입니다. 새로 배우는 리러닝보다 익숙한 성공 방식을 버리는 언러닝이 훨씬 어렵습니다. 그 방식이 과거의 나에게 효자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손이 비어야 새로운 무기를 쥘 수 있습니다. 머릿속이 과거의 성공으로 꽉 차 있으면 새것이 들어올 공간이 없습니다.

그에게 가장 힘들었던 것도 첫 번째 버림이었습니다. 박사 과정은 하나의 주제를 7년간 파고들며 데이터를 쌓아 결론에 이르는 귀납적 훈련입니다. 반대로 컨설팅은 첫날부터 가설을 세우고 연역적으로 검증합니다. 입사 첫 주에 파트너가 "그래서 답이 뭐예요?"라고 물었을 때 그는 당황했다고 합니다. 사고방식을 바꾸는 데에만 최소 1년이 걸렸습니다.

R, 계산해 보면 두려움이 사라진다

세 번째는 Risk taking입니다. 리스크 테이킹이라고 하면 절벽을 뛰어넘는 부터 떠올리지만, 33명의 경계인이 실제로 한 일은 삶이 굳어지지 않도록 의도적으로 아주 작은 실험을 반복하는 것이었습니다. 무모한 올인이 아니라 작은 테스트로 역량을 조금씩 높여 가는 과정입니다.

설로인의 변준원 대표는 새로운 시도 앞에서 바닥을 숫자로 현실화해 봤습니다. "망하면 끝"이라는 막연한 표현 대신, 300만 원과 3개월이라는 구체적인 손실을 계산해 보는 것입니다. 그 정도라면 해볼 만하다고 판단되는 순간 두려움은 사라집니다. 근육이 자라듯, 감당 가능한 리스크의 크기도 조금씩 커집니다.

GI, 97%는 그대로 두고 3%만 비튼다

네 번째는 Generative Innovation, 생성적 혁신입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오프화이트를 만들고 루이비통 최초의 흑인 디자인 리드가 된 버질 아블로의 3%의 법칙입니다. 혁신을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일로 여기지 말고, 기존에 잘하던 97%에 3%의 새로움만 더하라는 것입니다.

나이키 작업이 대표적입니다. 신발 밑창의 에어가 들어간 부분에 'AIR'라고 글씨를 써 넣었을 뿐, 모양도 제조 방식도 그대로였습니다. 바뀐 것은 보여주는 방식뿐이었지만 결과는 완전히 새로운 디자인이었습니다. 과거의 경험과 새 분야를 연결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부 새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N, 호기심은 근육처럼 길러진다

마지막은 Novelty seeking입니다. 궤도 안에 있으면서도 작은 시도를 계속하는 힘입니다. 전혀 다른 분야의 책을 한 권 읽어 보는 일, 주말에 자기 생각을 짧게 적어 올려 보는 일 정도로 충분합니다. 중요한 것은 크기가 아니라 지속성입니다. 매일 반복해야 습관이 되고, 그때 호기심 근육이 생깁니다.

컬츠업의 노성산 대표는 삼성전자 신입 교육에서 매스게임을 보고 "나는 픽셀이 되기 싫다"며 사표를 냈습니다. 그는 새로운 분야에서 0에서 85까지 올라가는 구간을 도파민 구간이라 부릅니다. 가장 재미있고, 그 분야의 핵심을 이해하게 되는 지점입니다. 85에서 100까지는 지난한 과정이라, 그는 그쯤에서 떠날 때가 됐다고 판단하고 다시 새 분야로 넘어갑니다. 백영재 박사가 AI에게 호기심이 있느냐고 물었을 때 돌아온 답은 "없습니다"였습니다. 호기심은 AI가 갖지 못한 인간의 영역입니다.

대치동 키즈가 위기를 맞은 이유

백영재 박사는 대치동 교육이 했던 역할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산업화 시대에는 빠르게 지식을 쌓고 효율적으로 문제를 푸는 능력이 절실했습니다. 문제는 이제 그 일을 AI가 훨씬 잘한다는 것입니다. 정답의 가격이 0에 수렴하고 있습니다. 그가 25년간 경영하며 얻은 결론은 메가 트렌드는 누구도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이고, 스탠퍼드와 하버드와 예일을 나오고도 일자리를 잡지 못하는 현실이 그 증거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실패 내성입니다. 대치동 교육의 핵심은 실패하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어서, 실패를 견디는 연습 자체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 자신도 예일대에 갈 때까지 "너는 무엇을 좋아하니"라는 질문을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첫 리포트에 돌아온 교수의 두 줄, "Great summary, but what is your opinion?"이 돌멩이로 머리를 맞은 듯한 충격이었던 이유입니다. 좋아하는 것을 못 찾겠던 그는 싫어하는 것을 빼는 전략으로 음식, 시각 콘텐츠, 테크, 사람이라는 네 가지를 남겼고, 그것이 20년 뒤 커리어의 연결고리가 되었습니다.

아이의 하루에 20%의 빈칸을

자녀를 경계인으로 키우고 싶다면 하루의 20%를 비워 두라고 그는 제안합니다. 구글의 20% 룰이 모델입니다. 엔지니어에게 일주일 중 하루는 원하는 프로젝트를 하도록 허락했고, 거기서 나온 것이 지메일입니다. 아이에게 필요한 것도 같습니다. 학원도, 숙제도, 부모의 지시도 없는 완전히 심심한 시간입니다.

멍하니 있다 보면 "이제 뭘 하지"라는 생각이 들고, 거기서 진짜 호기심이 시작됩니다. 그는 악동뮤지션을 예로 듭니다. 몽골에서 선교사 자녀로 자라며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되었던 시간, 휴대폰도 없던 그 지루함 속에서 아버지의 낡은 기타를 만지작거리다 음악과 가사가 나왔습니다. 창의력은 지루한 시간에서 나옵니다. 정답이 없는 공간에서 시행착오를 겪어야 나만의 관점이 생기고,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힘도 함께 자랍니다.

실패를 다루는 조직, 흩어진 경험을 묶는 법

조직에도 같은 원리가 적용됩니다. 스스로 문제를 정의하는 인재를 키우려면 실패를 정교하게 다루는 문화, 곧 안전지대가 필요합니다. 일론 머스크는 "무언가에 실패하고 있지 않다면 충분히 혁신하고 있지 않다는 뜻"이라고 말했고, 구글이 팀 성과의 첫 번째 조건으로 꼽은 것도 심리적 안정감이었습니다. 백영재 박사는 이런 안전지대는 탑다운으로만 만들어진다고 말합니다. "나는 실패해도 된다"를 아래에서 위로 만들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흩어진 경험이 불안하게 느껴진다면 방법은 의외로 단순합니다. 이력서라고 생각하지 말고 지금까지 해온 일을 일기 쓰듯 쭉 적어 보는 것입니다. 잘했던 것과 실패했던 것을 나열하다 보면 자기가 잘하는 일의 패턴이 보이고, 그것이 메타인지의 출발점이 됩니다. 그다음에는 지금 있는 자리에서 3%만 비틀어 보고,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리스크를 져 보는 것입니다.

다만 그는 마지막으로 당부를 남깁니다. 책에 담긴 33명의 사례를 정답으로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이야기는 나만의 지도를 그릴 때 참고할 나침반일 뿐, 나의 지도는 아닙니다.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해 불안했던 그 불편함이야말로, AI가 결코 가질 수 없는 무기라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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